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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시어록비(완)

[독립기념관 시어록비] 104-2 김규식

by 니들이게맛을아냐 2021.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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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내용]

 

전 세계의 동정만 가지고는 독립을 얻을 줄로 생각지 맙시다. 우리의 독립은 우리의 손으로만이 되옵니다. 우리의 독립은 우리의 맘으로만이 되옵니다. 우리의 독립은 우리가 단결하여 싸우되 마지막 핏방울이 떨어질 때까지 싸워야 되옵니다.

 

파리강화회의 직후 동포 앞에서

 

 

 

나의 경애하는 동포여!

분발하여 오직 우리에게 남아있는 우리의 나중의 핏방울이 떨어질 때까지, 우리의 나중 한 사람이 거꾸러질 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독립을 위하여 쉬이지 말고 낙심도 말고 혈전을 계속합시다.

 

파리 체재중인 김규식 박사가

미국 대한국민회에 보낸 편지 중에서

신한민보(新韓民報)19191018

 

 

 

[인물 설명]

 

우사(尤史) 김규식 선생은 18811월 아버지 김지성(金智性)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897년 미국 유학을 떠나 로아노크 대학(Roanoke College)에서 수학하고,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를 받은 후 1904년 귀국하였다. 1906년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여러 강연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했으며 191311월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 신규식과 함께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고 한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되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 자격으로 512일에 한국독립에 관한 청원서와 한국독립 항고서(抗告書)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고 한국독립과 평화라는 책자를 비롯해 다수의 독립운동 홍보문서를 작성하고 각국 대표들 및 언론인들에게 배포해 한국인의 독립의 열망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 1921년 임시정부 내에 독립운동 노선으로 갈등이 야기되자, 잠시 임시정부를 떠났다가 19231월 국민대표회의에서 국민위원과 외무위원을 맡았다. 19331월 미국을 방문해 한국대일전선 통일동맹운동을 전개하고 수천달러를 모금해 돌아왔으며, 19357월 조선민족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나 건강상의 문제로 사천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힘썼다. 194210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고 1944년 부주석에 취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을 대표하는 김구 주석과 민족혁명당을 대표하는 김규식 부주석 체제의 양대 정당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세력이 연대와 협력을 이루어가며 조국 광복을 이루어내었다. 선생은 1950년 북한군에 납치되어 그 해 1210일 평안북도 만포진 부근 별오동에서 7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김규식 비석 점역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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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설명 점역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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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내용은 독립기념관 시어록비에서 발췌하였습니다.

! 점자번역본은 첨부파일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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