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 내용]
민족(民族)에서 세계(世界)로
조선은 내 나라다.
나의 향토다.
생활의 근거지다.
문화 발전의 토대이다.
세계로의 발족지다.
함께 일어나 지켜야 하고
싸워야 하고
고쳐가야 하고
이를 방해하는 어떤 자들이고
부숴 치워 버려야 할 것이다.
민세 안재홍 선생의 1926년 12월 5일 조선일보 사설 중에서
[인물 설명]
호는 민세(民世)이며, 경기 평택(平澤)에서 태어났다. 1912년 일본 동경(東京)에 거주하던 한국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1913년 1월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에 재학 중 중국 상해로 건너가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서울에서 청년들을 규합하여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하고 총무를 담당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9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월 조선일보(朝鮮日報)의 주필로 재직하고 있을 때 신간회(新幹會)의 총무간사에 피임되어 강령을 작성하고 발표하여 창립총회를 개최하였고, 각 지방의 창립총회를 지원하기 위하여 강연 등을 실시하면서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28년 12월 전남 광주에서 학생운동이 봉기되자 당시의 정치단체인 신간회와 협동하여 조선일보 부사장직에 있으면서 ‘조선민중대회’를 열고 일제의 민족차별적인 처우를 규탄하다가 체포되어 1930년 1월 1일 기소유예 되었다. 1937년 5월 남경군관학교(南京軍官學校) 학생모집 운동으로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 회부되고 1938년 5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9년 3월에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서 착수한 조선어사전편찬사업에 연관되어 함경남도 홍원(洪原) 경찰서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후 미군정청 군정장관·민의원 의원 등으로 건국사업에 이바지하다가 6·25 전쟁 당시 납북되어 1965년 3월 1일 평양에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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